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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성도의 교제

[수요예배] 땅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과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 (사도행전 7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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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482회 작성일 19-02-1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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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중에서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회의 재판자리에 서게 되었고, 재판 중 얻게 된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하는 생애 마지막 한마디를 한다면, 나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봅니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잡힌 것 보다, 자신의 안위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도리어 스데반을 향해 분노했는데, 성경은 그 이유가 스데반의 설교가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으로 찔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힘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찔림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로 이끌어가는 찔림입니다.

하지만 오늘 스데반의 말씀을 듣고 찔림 받은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찔림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찔림받고 있는 그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고, 거부감을 느끼고, 그렇게 만든 스데반을 향해 분을 품고, 증오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분을 품고 성내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충동적으로 스데반을 죽일 정도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찔림을 얻는 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죄사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찔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의 기회이다. 


말씀의 찔림에 위협을 느끼고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담대히 기도하는 스데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성을 잃은 무리가 달려드는 모습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어떻게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스데반이 죽기직전 상황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동일합니다.) 

먼저 기록된 누가복음에서는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말했는데, 지금 스데반이 보고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는 겁니다

이미지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스데반이 목격한 예수님은 왜 서계셨을까요?

 

스데반이 지금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 자리는 재판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이 재판 자리에서 스데반에게 충동적인 사형을 구형하는 순간그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아마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실 수 없으셨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 아버지의 재판 자리에서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 스데반을 변론하고 계신건 아닐까요

사랑하는 스데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당신을 위해 죽임당할 스데반의 중재자가 되어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앉아있지 못하시고 서 계신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의 마음이 스데반에게 전해졌고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스데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곁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스데반을 가리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성령충만에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어떤 특별한 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능력이 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고, 하늘에 소망을 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그에게 조금도 위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았던,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람들은 땅에 소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찔림을 얻었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 불편한 상황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와 보여지는 신앙의 연륜을 무너뜨릴까봐 염려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성공에 목 매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찔림으로 이 땅에서의 영광을 위협하는 스데반을 죽이기라도 해서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지켜내야 할 것은 이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충만이 이루어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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