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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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232회 작성일 24-04-10 12:04본문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용서를 해야 하는 걸까요?
베드로가 이 문제를 예수님께 물으면서 7번까지 용서해야 하냐고 질문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의 교훈에서는 3번까지 용서를 베풀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베드로의 7번은 훨씬 더 관대한 자세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상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임금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이 임금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이 엎드려 용서를 구할 때
그 종을 불쌍히 여기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헬라어에서 가장 큰 숫자와 가장 큰 화폐 단위의 조합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갚을 수도 없는 큰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임금은 종의 말과 진심을 믿고 용서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큰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압박했습니다.
일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는 걸 감안하면 백 데나리온도 적은 액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주인은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종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히는 형벌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의 심정으로
용서를 베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용서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용서가 의무나 책임감으로 베풀어지는
자기 희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잘못을 끝까지 참아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뉘우치는 일을 기뻐하며 얼마든지 용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아주는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기준이 되어 사랑하고 용서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의 고백도 이런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성품과 삶 속에서 그 흔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 임한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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