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깨달음, 두려움, 그리고 선택 (사도행전 24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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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838회 작성일 19-06-11 22:57본문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소동으로 붙잡혔고,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면서 유대지방 총독인 벨릭스에게로 바울을 이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무리는 포기하지 않고 벨릭스 총독에게로 와서 또다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더둘로라는 변호사까지 데려와서 바울을 처벌할 명분을 세워보려고 했지만, 사도 바울이 조목조목 변론하면서 오히려 저들에게 고발할 명분이 없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일단 대제사장 무리는 돌려보내고, 바울을 구금하는 것으로서 재판을 연기시켰습니다.
벨릭스 총독에게 사도 바울의 사건은 귀찮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자기에게 유익될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총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생각하면 산헤드린의 대제사장 무리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로마 시민권자인데다가 무죄까지 입증된 바울을 처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재판을 연기시킨 것입니다.
벨릭스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은 자기 변론을 통해 스스로 무죄를 입증해낼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로마 시민권자였지요.
사도 바울이 마음 먹고 로마로 자신이 억울하게 갇힌 상황을 알리고 항의한다면 총독으로서는 곤란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자유를 허락해주고, 자주 사도 바울을 불러다가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하고 대화했습니다. 여러모로 고심하고 있다는 모양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총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도 바울의 관심은 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를 앞에 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의와 절제, 장차 올 심판에 대해 가르쳤다고 기록합니다.
이 주제는 불의하고 무절제한 벨릭스의 삶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도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나온 삶과 현재를 모두 뒤엎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려움은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알게 되었음에도 내 손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그 상황을 회피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그 힘은 반드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변화는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희생을 뚫고 나아가야 변화로의 한 걸음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벨릭스 총독과 같은 갈등과 선택이 오늘 우리 앞에도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겠는가?
분명한 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후로 벨릭스 총독은 더 자주 사도 바울을 불러 이야기 했는데, 그 목적은 재판을 빌리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에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지금을 딛고 일어서기 보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더 얻을까를 고민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도 돈에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복음 앞에서 우리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그 말씀에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순종하면 될 일이지만, 순종에 따라오는 희생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가서 무언가를 얻고자 했는데, 잃어야 될 게 더 크다고 느껴진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보화 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고 손에 들린 이 땅의 보화가 더 좋게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내가 지금 무엇을 얻을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샤머니즘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바라보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복'이 아니라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내가 지금 무엇을 얻을까?”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조금 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벨릭스 총독의 양심을 찔러 두렵게 하신 분도, 바울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살고 있고,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옳으심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따라가는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옳다는 걸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하며 계획해야 하는 복잡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굉장히 단순해집니다.
하나님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여정은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의 끝에서 비춰지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기쁨의 여정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려 한다면 기꺼이 삶의 자리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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