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사도행전 20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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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546회 작성일 19-05-14 22:00본문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에 사랑하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 고별설교를 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매여 있다는 건 속박당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자기 힘이나 의지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매여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죄인이 사슬에 매여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매여 있다는 말이 언제나 우리에게 갑갑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어딘가에 매여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매여서, 사랑에 매여서, 직장에 매여서, 성공에 매여서, 꿈에 매여서, 가족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누가 자신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에 매여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길까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매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디에 매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매여 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이끄신 까닭에 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야된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은 지금 자유를 잃고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입니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매임이라는 것은 사실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순종하는 믿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율법이야기가 나오는데, 종의 몸값을 지불한 시점에서 종에 대한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에 따르면 종이 주인을 섬긴지 6년이 되면, 다음해인 7년째에는 종에게 자유를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와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받은 은헤에 대해 반응하는 하나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자유를 얻게 되는 7년 째에, 주인의 입장에서만 자유를 줄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종도 선택을 합니다.
주인이 베풀어준 은혜로 자유를 얻어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 것인지, 아니면 지금 모시는 주인을 영원히 주인으로 삼고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당연히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종의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바로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섬기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6년 동안 경험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나의 평생을 맡길 수 있는지 아닌지를 종도 생각을 하고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떠나 홀로서는 게 은혜인지, 주인의 품 안에 머무는 게 은혜인지는 경험한 본인만이 알 것입니다.
그렇게 종으로 남기로 선택하면 송곳으로 귀를 뚫어서 영원히 자기 주인을 섬기겠다는 표시를 몸에 새깁니다.
과연 어떤 선택이 나에게 유익할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나의 일생을 맡길만한 주인이라면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성령께 매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고 행동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매여 있기를 소원합니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끄시고 거기서 어떤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신뢰할만한 분께 인생을 맡겼는데, 앞으로 가야할 길에서 결박당하고 괴로움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선뜻 괴로움을 당하겠다고 자처해 들어갈 수 있을까요?
보통은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사도 바울께서는 환난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그곳을 가기로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마주하는 두려움보다 이미 받은 은혜가 훨씬 더 커서, 두려움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경험이 사도 바울의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은혜는 무엇입니가?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박해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과거의 그는 하나님 편에서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자신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의 은혜를 깨달아 알았고, 그 은혜로 힙 입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혜에 반응한 삶으로 행동하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졌던 은혜와 동일한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이미 주어졌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알기 때문에, 종에게 자유를 주고 은혜를 베푸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던 주인의 마음처럼,
그리고 주인을 향한 신뢰함으로 마땅히 따라가기를 선택하는 종의 마음처럼,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은혜를 행동하면서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은혜를 따라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전하고 증언하는 일들에 인생을 걸었고, 하나님의 마음도 사도 바울을 그 길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요?
(고후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달라서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 안으로 끌어들여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은혜를 경험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도 화목하길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고, 그 하나님의 뜻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의 소식을 세상에 알려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돕는 사람들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게 우리가 받은 사명의 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길, 그래서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그 길의 모양이나 방향은 다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로 공통됩니다.
우리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각자에게 꼭 맞는 답은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령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가는 것입니다. 일어날 앞일을 알 수는 없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매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찾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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