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창세기 27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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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602회 작성일 20-01-21 23:40본문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하는(?), 사실은 이삭의 의도와는 달리 에서에게로 가야할 복이 야곱에게로 넘어간 이야기를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 사이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고, 이삭과 리브가는 각각 큰 아들 에서와 작은 아들 야곱을 편애했지요.
시간이 흘러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졌고,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 큰 아들 에서에게 복을 주기위한 준비를 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리브가가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서 형의 복을 가로챌 음모를 계획하면서 야곱을 에서보다 먼저 아버지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 먼 아버지 이삭은 자기 앞에 온 아들이 야곱인 줄 모르고 에서에게 주려고 준비한 복을 다 야곱에게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네 사람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7장 속에서 드러난 네 사람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나' 중심의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삭은 큰 아들 에서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장자'의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고 전달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 역시 그러한 사명을 가진 자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과정과 방법이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장자에게 대부분 돌아가야 할 복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했다면 거기서부터 이미 잘못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편애’라는 자기 생각, 자기 감정을 개입시켜서 자기 방법대로 일을 추진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삭의 큰 실수였습니다.
특별히 1절을 시작할 때 이삭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고 기록한 것은 이미 그의 영적인 눈도 함께 어두워졌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의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자기 자아가 더 강하게 살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이삭이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판단한대로, 자기 감정대로, 자기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을 에서에게 주기로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곱에게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야곱의 뒤에서 이 모든 음모를 꾸미며, 거짓과 속임수로 아버지를 기만하고 복을 가로채도록 주도하는 일을 이 리브가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의 가능성은 이삭이 에서를 편애했듯이 리브가도 야곱을 편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의 가능성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거짓과 속임수를 주도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녀가 사용한 방법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리브가에게는 그렇게 무모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야할 정도로 자신이 이루어내려는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일이 틀어저 받을 저주까지 자신이 감당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그야말로 ‘나’ 중심의 사람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이미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의 축복도 가로챈 것입니다.
야곱이 잠시 주저했던 것은 거짓이 탄로나서 저주를 받을까봐 염려했던 것이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복을 가로채는 이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하나님까지 끌어들여서 거짓말을 완성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만을 놓고 본다면 에서는 철저히 피해자였고 동생에게 복을 빼앗긴 불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그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고, 자기 능력을 신뢰하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던 그 사건들이 말해준 것은, 하나님의 복은 이미 에서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과는 먼 사람, 곧 하나님의 복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의 사건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에서는 단번에 야곱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 중심의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여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거짓과 속임수와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이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거짓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삭의 입으로 선포된 말일 뿐이지만, 이 복을 차지하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서슴없이 말했던 이 사람들 모두가 이것을 단지 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미 내뱉어진 말로 인해 복을 얻게 되었고, 심지어 에서에게 돌아갈 복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삭은 에서에게 동생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복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렇게 모두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25:23)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 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이 받은 축복은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에서가 받은 축복은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의 이야기만 가득한데,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복의 영향력은 살아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만 이삭의 말이었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이삭에게 남겨진 사명은 하나님의 복을 그저 전달해주는 임무였고, 이삭은 그 임무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의 방법이 바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상황을 이끌어가셨습니다.
(잠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이 아무리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려고 했어도, 처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이끌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 개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여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우리 이름없는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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