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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성도의 교제

[수요예배] 형통한 사람 (창세기 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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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름없는교회 댓글 0건 조회 1,665회 작성일 20-04-1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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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도리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소년이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잠시 끊어졌지만, 요셉의 이야기는 37장에서 39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37장에서 요셉은 형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39장에서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살이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가정의 총무자리까지 올라갔지만, 주인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이유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런 험난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창세기 39장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요셉이 가정의 모든 일을 맡아 관리할 때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심으로 형통함을 보여주셨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며 그를 형통하게 하심을 보디발이 보았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요셉의 형통에 대해 말하자면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서 오늘은 요셉이 감옥에서 은혜를 얻는 장면을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간수장에게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더하신 인자’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헤세드를 사랑, 인자, 은혜, 은총, 친절, 자비, 경건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을 하는데, 헤세드라는 단어가 그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간수장에게 받은 '은혜'는 히브리어로 이라고 합니다

헨은 사람의 마음으로 베푸는 호의나 친절을 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인자와 은혜는 유사한 의미처럼 보이지만 헤세드(하나님의 사랑)와 헨(사람의 친절)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질적인 차이는 그 인자와 은혜가 어디서 나왔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헤세드가 쓰일 때는 보통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많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라는 성품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 안에 헤세드라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헤세드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요셉에게 하나님의 헤세드가 더해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요셉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헤세드를 더하셨다고 했을 때에는 그 안에 요셉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의미가 숨겨져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실패와 좌절, 고통으로 인해 믿음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로 인해 요셉이 삶의 현장에서 얻게 된 것이 간수장의 은혜입니다

비록 종이었지만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했던 것처럼, 이 간수장도 요셉에게 모든 죄수를 관리하고 감옥 안에서 제반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들을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생각처럼 하나님의 형통과 현실적인 복이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의 의미합니다. 형통함의 증거가 환경적으로 잘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물론 형통의 결과가 부와 명예, 환경적인 번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고해서 형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형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다면 요셉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결코 하나님을 의심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지금 처한 내 상황은 최악인데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형통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지만 좌절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게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먼저 포기하시고 떠나시는 것이겠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볼 수 없다고,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조금 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형통한 사람이 되는 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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